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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을 깊이 파면 왕위찬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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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2008-02-21 11:2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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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을 깊이 파면 왕위찬탈 ?

오마이뉴스|기사입력 2004-12-08 11:21 |최종수정2004-12-08 11:21
[오마이뉴스 한성희 기자]
▲ 비안개가 자욱한 순릉 숲. 멀리 안개 너머로 영릉 숲 능선이 보인다.
ⓒ2004 한성희
안개 낀 숲을 걷는다. 이슬비가 내리는 숲은 사방이 뽀얀 안개로 가득하다. 안개 속에 보이는 숲의 신비로움에 취해 멍하니 바라본다. 신비로움은 인간에게 알고 싶다는 갈망을 불러 일으킨다.

반투명한 안개 속에 보이는 저 순릉의 석물들과 공혜왕후의 실체는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안개처럼 불투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생각을 한 여인이었는지, 자신에게 왕후의 삶은 어떤 의미였는지, 하나도 모르고 계속 모를 것이다.

▲ 성종 원비 공혜왕후 순릉.
ⓒ2004 한성희
조선의 국장제도를 3회 쓰고 나서 거의 기진맥진했다. 밤새워 쓴 기사를 올려놓고 잠에 빠져들어 낮에 종일 잤는데 밤이 오자 또 잠이 몰려왔다. 이로써 거의 20여 시간을 잠만 잤다. 써놓고 보니 보충해야 할 것은 너무 많은데 또 쓰자니 겁부터 덜컥 난다.

조사와 어미 빼곤 온통 한문 투성이로 보이는 저 골머리 아픈 조선왕조실록을 내 알량한 한자 실력으로 씨름하고 자료 뒤지기와 정리하기를 해야 하나 싶어 미적미적 미뤘다.

문헌과 씨름하는 것은 곤혹스럽다. 한자도 한자지만 안 쓰는 용어들로 가득해 그 난해한 '수용미학'을 읽을 때보다 머리가 더 쥐가 나고 아팠다.

잘 이해 안 가는 글이라 다섯번 되풀이 해서 읽어야 겨우 이해가 갔다. 문헌만으로는 부족해서 확인 취재해야 하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다. 학교 다닐 때 이 반 정도만 공부했다면 장학금은 문제없이 받았을 것이라는 푸념을 수없이 했다.

조선왕릉은 학자들에게 인기 있는 분야는 아닌지라 마땅히 참고하거나 해석해 줄 서적과 사람을 찾기도 어려웠다.

그렇다고 해서 그 방대한 조선의 국장제도를 그대로 옮겨봐야 독자들도 머리에 쥐가 날 것이므로 필요한 정보만 간추려서 쓰다보니 빠지고 미흡한 점이 많았다.

이제 기운을 내서 미뤘던 조선의 국장제도를 보충하려 한다.

조선의 국장은 밤중에 발인해서 대궐을 출발한 예가 많다. 또 관을 하관하는 시각도 한밤중이거나 새벽일 경우가 많다.

자시(23시-01시)에 하현궁(下玄宮·하관)한 왕은 태조고, 축시(01시-03시)는 세조, 문종, 숙종계비 인현왕후, 영조의 왕비 정성왕후가 있고 인시(03-05시)는 세조의 비 정희왕후, 현종 비 명성왕후, 철종비 철인왕후가 있다. 또 새벽 5시에 예종이 하관했고 새벽 3시에 중종이 하관했다.

▲ 중국 풍수지리지에도 소개됐다는 명당인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의 소령원. 묘에 이르는 200여m 구불구불한 언덕이 흡사 황룡이 꿈틀대는 것처럼 보인다.
ⓒ2004 한성희
밤중이나 저녁에 발인해서 국장행렬이 장지로 갈 때는 싸리 횃불 500개가 동원됐다. 백의와 백건을 두르고 흰 버선을 신은 상여꾼 800명이 대여를 드는데 4번 교대한다. 이 싸리 횃불은 조선시대의 국장행렬이나 하관을 할 때 쓸 뿐 아니라 결혼식에도 썼다.

싸리나무를 다발로 굵게 묶어서 쓴 것으로 추측하는(싸리 횃불 모양이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싸리 횃불은 기름기가 많아서 불이 잘 붙고 나무가 단단하며 연기가 잘 나지 않는다.

조선의 결혼식은 저녁에 했다. 결혼의 혼(婚)자를 파자하면 女子가 어두운 저녁(昏)에 맺어진다는 의미다. 세종 11년(1429) 2월 5일, 결혼식장 초례청에 밝히는 싸리 횃불을 정2품 이상은 양쪽에 5자루씩 10자루를 쓰고, 3품 이하는 6자루를 쓰도록 정했다.

사대부 집안의 장례에 쓰는 싸리 횃불도, 세종 15년 8월 24일 정2품 이상은 20자루, 2품 이하는 12자루를 쓰게 정해서 국장과 꽤 차이가 났다. 싸리나무가 귀한 것도 아닌데 숫자를 정하기까지 했으니 왕과 일반인의 신분차이를 확실히 못박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왕의 무덤 깊이와 천기누설

왕릉 자리를 정할 때 풍수로 명당을 선택하는데, 왕릉 길지를 살피고 점혈 하는 관리를 상지관(相地官)이라 한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북현무, 남주작, 좌청룡, 우백호로 둘러싸인 곳 끝머리 황룡(黃龍)이 있는 곳이 왕릉터가 된다. 양쪽에서 명당수가 흘러내리는 배산임류(背山臨流)의 이런 명당 자리를 길상지라 한다.

상지관이 왕릉 자리를 점혈(點穴)하면 다시 의정부 당상관이 주위 나무를 베어내고 산세를 살핀 뒤에 왕에게 보고한다. 왕은 직접 현지를 답사하거나 도면을 본 뒤 최종 확정한다.

요즘 수맥에 관심이 많은데다 과학으로도 수맥 현상이 증명돼 질병을 유발하는 수맥을 피하기 위한 갖가지 방법이 나온다. 풍수에서도 묘 자리를 잡을 때 수맥을 금기시한다. 그 수맥이란 것이 지하 70-80m에 있으니 육안으로 봐선 알 방법이 없다.

수맥 위에 잡은 묘는 시신의 뼈가 까맣게 변한다. 수맥에 쓴 묘는 후손에게 감응해 우환을 끼치는데 수맥이 머리를 지나가면 머리에 이상이 있는 후손이 나오고, 다리를 지나가면 다리를 다치거나 못쓰는 가족이 나온다고 <고려·조선릉지>의 저자 목을수씨는 말한다.

▲ 목을수씨에게서 받은 24방위표. 풍수를 공부하려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한다.
ⓒ2004 한성희
목을수씨에 따르면 묘의 후손감응은 3대를 넘어서지 않기에 제사도 3대를 지내는 것이라 한다. 화장을 하면 후손에게 아무 해가 끼치지 않으니 겨우 3자(90cm)나 4자(120cm)를 파고 묻는 요즘 공원묘지 장의 풍습보다 차라리 화장이 더 낫다고 밝힌다.

참고로 목을수씨에게는 재미있는 일화가 많다. 그에게서 들은 재미있는 얘기들은 다음에 소개하기로 하고 다시 왕릉풍수로 돌아가 보자.

▲ 소령원 숙빈 최씨 무덤 뒤에 불쑥 솟은 잉. 무덤 뒤에 작은 잔디 언덕이 명당에서 보인다는 잉(孕)이다.
ⓒ2004 한성희
흉당의 대표적인 사례는 벌레가 나오는 충렴, 수맥이 흐르는 수렴, 시신이 감쪽같이 사라진다는 도시혈을 들 수 있다. 왕릉을 잡을 때 파서 오색토가 나와야 하는 조건도 포함돼 있다. 오색토란 명당의 조건으로 꼽히는 흙이다. 돌이 나와도 안되고 습기가 있는 진땅도 후손에게 우환이 생기므로 안된다.

그렇다면 왕의 무덤 깊이와 넓이는 얼마일까?

왕실풍수에서 왕기를 받는 깊이가 10자(3m)라고 이미 밝혔다. 당시 조선왕실은 일반 백성들이 무덤을 10자 깊이로 파서 왕기를 가로챌까봐 이 사실을 극비에 부쳤다. 나아가 국법으로 일반 백성들의 묘를 얕게 파도록 정했다.

풍수에서 무덤은 최소한 6자 이상이 되야 후손 발복으로 인재가 나온다고 한다. 신하나 대신에게도 적용된 일반인 5자(1.5m) 깊이를 어기면 왕위찬탈 음모를 꾀한 중죄인으로 몰린다. 인재가 많이 나오면 왕의 자리가 위태롭다는 이유일 것이다.

조선왕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왕기가 있을 만한 전국의 명당을 골라 절을 짓고, 탑과 당간지주를 세워 지기(地氣)를 눌러버렸다.

풍수에 대한 조선왕조의 신봉은 신경질적일 만큼 강했다. 태조 이성계가 태어난 함흥은 원래 함주(咸州)였던 것을 왕이 일어났다 해서 함흥(咸興)으로 격상시켰고 고을 주(州)가 들어간 지명은 천(川)으로 낮춰버렸다. 과주가 과천이 되고, 묵주가 묵천, 진주가 진천으로 바뀐 것은 태종 15년(1415)인데 이것도 병적으로 과민한 왕실 풍수 때문이었다.

동구릉이나 서오릉에 왕릉이 몰려 있는 것도 조상 묘를 한 능선에 집단으로 쓰면 땅의 지기를 집중적으로 얻는다는 풍수에서 연유한 것이다.

▲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어머니자 영조의 후궁인 정빈 이씨의 수길원. 풍수에서 대가 끊기는 흉당이라 한다.
ⓒ2004 한성희
고려도 왕릉과 귀족을 제외하고 일반인은 2자(60cm)에서 3자(90cm)를 팠다고 기록에 나와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무덤 깊이에 관한 풍수의 비밀을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초기에는 모든 왕릉을 10자로 팠으나 중기부터 혈의 깊이가 신축적으로 변했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손꼽히는 명당인 융릉으로 천장한 정조는 정말 풍수에 박식한 왕이다.

방대한 저술을 남긴 정조는 <홍재전서>(弘齋全書) 잡저(雜著)편 천원사실(遷園事實)에서 "혈(穴)의 싶이가 8-9자면 깊은 데 속하고 5-6자 이내는 낮은 데 속한다. 대체로 마땅히 얕게 파야 할 곳을 깊게 파면 지기가 광중 위로 스쳐지나가고 반대로 깊어야 하는 데 얕게 파면 지기가 광중 아래로 지나가니 깊고 얕음을 적절히 해야한다"고 썼다.

사도세자를 명당에 묻으려고 현재 경기 화성에 있던 수원부를 현재 수원 자리로 200여 호 마을을 모조리 옮기고, 수원부 객사(客舍) 뒤의 화산(花山)으로 천장을 단행한 정조는 이장에 길한 해를 택하려고 13년을 기다리기까지 했다. 사도세자의 융릉은 물론 정조가 직접 가서 보고 선택한 것이다.

정조의 풍수 실력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정조는 광중을 팔 때 10자를 파지 말고 7자를 파서 흙의 색깔이 좋은 진토가 나오면 중단하라고 명했다. 광중을 파내려 가자 정조의 예언은 맞아서 생기를 가진 흙이 나왔고 그 지점에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를 합장한 것이다. 아마도 이 흙이 오색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정조가 왕이라 하나 당시에는 왕의 아버지라 할지라도 능으로 추존할 수 없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무덤을 현융원(顯隆園)이라고 명명했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를 백성도 꺼리는 파묘(다른 시신을 쓰고 파낸 묘) 자리에 파묻어 버려 복수를 하고, 최고 명당자리에 아버지를 옮겨 한을 풀었다.

고종은 대원군의 왕실 권위 되찾기에 동조했는지 유난히 많은 조상무덤에 존호와 능호를 내려 추존한다. 현융원도 광무 3년(1899년) 11월 12일(양력) 장종(莊宗)으로, 12월에는 장조(莊祖)로 추존하는 절차를 밟아 고종이 황제에 오른 뒤에는 융릉이라는 능호를 쓰게 된다.

고종이 사도세자까지 황제로 추존했으니 능도 만들지 못해 원으로 그쳤던 정조의 한은 풀리고도 풀렸을 것이다. 그러나 정조 이후 조선이 급속히 몰락하는 과정을 보면, 정조가 원했던 아버지의 발복은 받지 못하고 할아버지 영조의 파묘자리 흉당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든다.

▲ 늦가을에 나오는 가지 버섯. 지난 12월 4일 영릉 숲에서 촬영한 것이다.
ⓒ2004 한성희
12월에도 낙엽 속에 보라색 가지버섯이 솟아오를 정도로 흙에는 왕성한 생명력이 있다. 그렇게 조선조 왕들이 집착했던 왕릉풍수라는 것도, 자연 속에서 태어나 살다가 흙으로 되돌아가서 자연과 일체로 변하는 과정이라고나 할 무상함이 보인다.

/한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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